글을 시작하기 전에 우선 중요한건 릴리 슈슈는 허구의 존재가 아니다. 영화 내에서는 확실하게 존재한다. 애당초 그게 아니라면 콘서트가 열릴 이유도 없다. 최소한 이세계아이돌 같은 이상한 문화는 집어치운다면. 당연히 현실에서 ‘릴리 슈슈’는 허구의 인물이지만, 이 소설이 독자 참여형 게시판을 토대로 만들어져서 그런지 특정 설정과 사실의 범위를 잘 구별하지 못하는 현상이 종종 일어나서 정말 잘못된 해석이 종종 보인다. 나는 『릴리 슈슈의 모든 것』을 파란노을의 『To See the Next Part of the Dream』을 통해 처음 들었고, 그로부터 대략 3년 반 만에 처음 감상하게 되어 키보드를 두들기게 되었다. 아마 그 앨범의 앨범커버와 인트로곡인 『아름다운 세상』의 첫 부분의 『릴리 슈슈의 모든 것』을 샘플링했다고 들었다. 나는 내심 시네필이라고 자부하면서도 특히나 블로그에 영화만을 다른 글이 없다는 사실을 항상 부끄럽게 생각한다. (물론 pta의 데어 윌 비 블러드를 감상하고 적기는 했다만, 그건 ost와 음향 분석에 가까워서. 그나마 있는 영화적 요소도 기술적으로 미장센을 분석한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이다.)

그래서 오랜만의 블로그 글 작성을 영화 감상문으로 결정했다. 키에르케고르는 한국어 우울과 대응되는 두 개념으로 melancholy와 Heavy-mindedness를 구분해서 제시한다. 대략 그런 맥락에서 이 영화를 해석해보고자 한다.

배경음악 - 제발 꼭 틀어주길


이렇게 글을 적는게 마치 영화속의 그 장면과 흠칫 비슷하게 느껴진다. 당황일지 몰입일지 모르지만 나는 내가 무심스럽게 적은 대명사 ‘그 장면’의 대상을 다시 찾아 떠나며 이 글을 시작하고자 한다. 영화 『릴리 슈슈의 모든 것』을 초회차로 감상하고 개인적인 감상을 적어보고자 하는 의식적인 표출 욕구가 그 대상일까. 아니 대명사를 적은 행위 자체가 그러한 욕구를 적어낸 활자에 가까우려나. 단순히 영화에서 나오는 키보드 소리와 내 키보드가 비슷하기 떄문에 일어난 연상일지도 모른다. 근데 내 키보드는 저소음 적축이라 소리가 거의 안 들리는 편에 속하지 않나. 영화에서 보인 여러 비도덕적인 상황들과의 나의 유사성을 인식한 것일까, 또는 부정하려는 방어기제일까. 언어와 표상이 직조해낸 세계 - 그것이 으레 느끼는 인상보다 더욱 비연속적이고 파편화되었다는 개인적인 감상이 앞선다. 이 무언가 복잡한 무의식적인 감상을 여러 방향에서 담아 잘 전달해야만 할텐데. 인과관계가 불명확하다. 인과관계의 불명확함을 말하는 이 감정과 사소한 문법까지도.

비요크, 드뷔시, 그리고 릴리 슈슈. 이것들은 영화 초반부에 ‘에테르’를 가졌던, 또는 표현해냈던 가수들로 언급된다. 사실 에테르를 이분법적인 어떤 무언가로 표현해내기가 키지 않는다. 사람의 기억과 연상은 꽤 자주 도식과 직관적인 감정에 의존하는 편이니까. 어떤 복잡한 무언가를 명료화하고 기억으로의 경로를 두껍게 형성하고 유지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그림자와 부스러기, 그리고 그것과 아무튼 무언가 관계를 가졌던 ‘잊음’을 소유하려는 실속 없는 정서가 아닐까.

기술의 발전이든, 한낱 나의 기억의 인지적 불확실성이든, 빠른 속도로 일소한 무언가를 보존하려는 그 욕망이다. 아직 내 앞에서, 정확히는 손 앞에서 완전한 형태로 (그것은 불가능하겠지만) 인식하는, 또는 되는, 또는 당하는 무언가 또는 나의 존재 그 자체에 대하여 그것의 모든 측면이 인식 주체로서의 나와 완전히 연결지을때, 그 감정은, 그 감정이 존재한다는 가정 하에 결코 우울하지 않다. 완전히 그의 현존을 잊은, 또는 잊혀진, 또는 잊힘-당할때도 마찬가지로 그 감정은 결코 우울하지 않다.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들 앞에서 우리는 우울하다. 정확히는 탈신비화의 역연산을 거치든, 탈신비화를 거치지 않든 세계속에서 밝혀지지 않은 무언가 앞에서야 우리는 우울하다. 하지만 더 이상 현존하지 않는 것들의 존재는 부재하는 현존으로서 현존한다. 사라진 어떤것을. 완벽하게 잊지 않고서야, 또는 잊지 못해서야 상태의 중간 어딘가에서 ‘소멸됨으로서 살아있는 무언가’를 느끼고 추구한다.

그것이 영화에서 제시하는 에테르가 아닐까.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데아든 (특히 동굴 실험에서), 마이컬슨-몰리 실험의 에테르든, 신학에서 발하는 부정신학이든, 해체주의적 관점이든, 외부세계를 상정하는 형이상학적 실재와는 관계없이 이 모든것은 넓은 관점에서 에테르로 정의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도, 잃어버린 것들 속에서 부유하는 개인의 그 무언가, 그것이 바로 에테르가 아닐까.

“릴리가 말하는 에테르는 감성의 촉매라고도 말할 수 있지 (…)”

나는 시간성과 감성 (또는 감정)을 통해 인식적 한계를 설명하는 몇몇 철학자들과는 달리 인식적 한계에서 시간성과 감성 (또는 감정)이 촉발된다고 생각한다. 소멸됨으로 살아있는 무언가. 이 영화는 그것을 비극적으로 조망한다. 영화의 주인공들도 그것을 추구하는것도 마찬가지다. 도래하는 의문이란, 비극적인 조망과 소멸됨으로 살아있는 무언가의 선후관계와 포함관계는 역시 모호함의 영역이다. 나는 종종 그 인과관계가 뒤틀리는 경험을 한다. 구조적으로 실험적인 시도를 한 영화는 엄청나게 많다. 그렇기에 『릴리 슈슈의 모든 것』이 영화학적인 관점에서 그 구조가 특별한 역할을 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하지만 릴리 슈슈의 전개 방식과 구조는 분명히 감상자에게 깊은 우울함을 가져다준다. 이것은 2020년대의 중반에 들어선 우리에게 영화 자체도 소멸된 무언가를 상징하며, 영화의 각각 분절된 무언가도 서로 밝혀지지 않으며 끝없이 되내이며 소멸해가는 그 자연스러운 과정을 담고, 또한 그러한 관계 자체도 스스로 소멸하기 때문이 아닐까.

이와이 슌지 감독은 『릴리 슈슈의 모든 것』을 제외한 그의 커리어에서 가장 큰 족적을 남긴 『러브레터』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모티프로 했다고 말한다, 다시 소급하여 프루스트는 그의 매형인 앙리 베르그송의 『물질과 기억』을 보고 나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적었다. 이 계보학적인 관계를 따지다보면 어쩌면 이와이 슌지 감독은 베르그송에게 일부분 영향을 받았으리라 짐작하기가 어렵지 않다. 삶의 약동(맥동), 끝없는 현상학적, 관념론적 변유론의 그 포스트모더니즘스러운 무질서함과 무정의가 나는 이 영화의 우울을 크게 뒷받침한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존재가 정의되고 태어나며. 그 개념이 변양되고 사라지기까지 얼마나 많은 따름과 양태를 겪는가. 이 영화는 특정 관계에 집중해서 보아서는 안된다. ‘소멸됨으로서 살아있는 무언가’ 그것이 정의하는 (했던) 여러 관계성의 복잡한 얽힘과 상호 모순관계가 이 영화의 감성적인 측면을 처절하게 조망한다.

영화를 관통하는 가상세계와 현실세계의 괴리, 특히 릴리 슈슈를 호시노 (파란 고양이)가 자신과 유이치(필리아)를 연결짓는, 또 연결짓고있는 릴리 슈슈의 CD를 강제로 자위를 시키면서 부셔버리지 않는가. 이렇게 현실세계와 유리된 가상세계.

그 당시 사회상에 대한 반영론적인 방향의 해석. 2001년, 21세기의 첫번째 해. 아날로그 필름 카메라가 디지털 카메라에게 대체되는 그 과정을 그대는 아는가? 아이러니하게도 『릴리 슈슈의 모든 것』은 일본 내에서 제작의 모든 과정에서 고전적인 아날로그 방식이 사용되지 않는 첫번째 영화이다. 어쩌면 그 당시 , 또는 현재의 우리에게 내재된 디지털과 최신 기술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영화는 표현한다.

작품에서의 어른들은 적어도 유이치의 시선에서는 그 존재의 일면과 책임이 작게 느껴진다. 극 내에서 어른들을 무능하고 관조하는 존재가 아닌가? 중학교 2학년의 시선에서 그것은 자연스러운 설정이기도 한다. 다만 중학교 1학년 당시에는 ‘버스 납치사건을 보며 ‘저런 것들은 사형해야돼’와 같은 대사도 등장하며 어느정도 영향력을 발휘하지만, 특히 오키나와 섬 장면에서 여행자 아저씨가 사망하게 되었을때 비로소 어른의 영향력, 지배와 피지배의 억압적 구도는 깨진다.

영화속에서 인물들은 쭉 소통에 실패한다. 호시노는 나름대로 첫사랑이 쿠노라고 공연히 말하면서도 그녀를 강간한다. 츠다에게 알몸사진을 빌미로 협박해 원조교제를 시키고, 위에서 말했듯 중학교 입학 이후 첫번째로 친해진 친구인 유이치를 때리고, 옷을 벗기며 강제로 자위하도록 한다. 심지어는 릴리슈슈의 CD를 부순다 심지어 호시노는 초등학교 시절 이지메를 당하기도 했고, 이후로 자신과의 소통에도 실패하며 오키나와 섬에서 ‘잘못된 것을 들고오면 나가지 못한다’는 말을 듣고, 자신과 큰 관련이 없는 도쿄대출신의 한 형이 죽은것에 큰 죄책감을 얻으며 도둑질로 얻은 돈을 바다에 뿌려버린다. 츠다가 자살하기 이전, 유이치는 사사키가 츠다를 좋아하는것을 알고, 호시노의 츠다에 대한 괴롭힘을 내가 구원해줄 양, 둘을 연결해보지만 츠다는 사사키의 고백을 거절한다. 사사키의 의도, 츠다의 의도, 호시노의 의도 전부가 완벽하게 불일치된다. (츠다는 이때 모든 남자가 전부 고객으로 보인다고…)

영화 마지막에 릴리 슈슈 콘서트장, 온라인에서 유이치와 대화하고, 또 서로 공감해주며 특정한 내적 상태를 공유했던 모두가 한 곳에 모이며, 과연 그 ‘에테르’가 무엇인지 나름대로의 토론을 한다. 온라인에서 파란고양이는 필리아에게 파란 사과를 들고 있겠다고 했다. 그리고 호시노는 유이치의 티켓을 찢어버리고 콜라 셔틀을 시켰다. 이 둘이 서로 같다는 사실을 목도한 둘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적어도 유이치 (필리아)에게 이 사건은 끝없는 침잠속의 강렬한 내적 추동을 불러 일으켰으리라. 유이치는 호시노 (파란 고양이)를 칼로 찔러 죽였다.

“필리어님” “릴리 라이브에서 만납시다” “표식은” “파란 사과” “아이디:파란 고양이”

앞 대목에서 나는 호시노가 자신과의 소통에서도 마찬가지로 실패한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영화 흐름상 호시노가 변해버린 이유는

  1. 초등학교 시절 겪은 따돌림

“얼마전, 그 집에 자고갔는 맛있는 음식을 (호시노의 엄마가) 얼마나 많이 주던지” “왕따 방지 대책이었나 싶었지” “왕따 방지 대책?” “맛있는거 많이 먹이고 우리 애랑 친구해” “알 것 같아”

뭐 이런 말을 뒷다마 비슷하게 하던데, 호시노가 이 말을 들은건 아니지만 꽤 컴플렉스라고도 보인다.

  1. 집안의 파산, 부모님의 이혼

호시노가 츠다를 아버지의 옛 소유 공장에서 (츠다를 질투하며 이지메시키는 여자애들의 요구에 따라) 강간하며 그 모습을 보는 (이지메를 주동하는 여자애중 하나인) 칸자키 스미카가

“그거 알아?” “원래 여기 호시노네 공장이었대” “회사부터 가정파탄” “호시노 왕자가 미칠만 하지”

뭐 이런 식으로 비꼬는데, 이것도 정신적으로 큰 충격을 가져다주었을것.

  1. 오키나와 여행에서의 여행자 아저씨의 죽음 위에서는 어른와 비-어른(청소년과 아이라는 단어가 이 측면에서는 너무 강압적인 표현이라고 생각한다.)간의 지배-피지배라는 구도를 중심으로 설명헀는데, 무엇보다 당시까지는 우등생에다가 머리도 좋고 잘생겨서 질투도 받는 호시노에게 자신이 도둑질을 해서 여행을 왔다는 죄책감, 특히 호시노가 물에서 의식을 잃어 죽을뻔한 장면에서

“오키나와 전설에선 사람에게 혼이 7개 있다고 해” “넌 2개 잃어서 5개 남았어” “섬에 나쁜걸 들여온거 아니야?” “신을 화나게 하면 살아서 못나가”

라고 아저씨가 말했다. 호시노의 입장에서는 실제로 그 이전에 호시노의 친구가 날치에 맞아서 죽을뻔 헀고, 그 이후에 여행자 아저씨가 죽었던 것을 보면, 영화 설정상 호시노는 그 죄책감을 크게 가졌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종종 남자애들은 좋아하는 여자애들한테 못되게 군다는 이야기를 경험하거나, 전해 듣는다. 표면적으로는 부끄러워서 그렇다는 단순한 해석이 제일 타당하지만, 나는 이 감정을 보다 깊은 무의식속 소여에서 탐구해보고 싶다. 과연 사랑의 양가적인 모습은 어디서 보이는것일까. 씨발 모태솔로라서 나는 모르겠다고 개씨발…

호시노는 첫사랑인 쿠노를 강간하는 매우 과격하고 헤비한 방향으로 이러한 감정을 표출하지만, 일부러 소프트한 감정을 찾아보면

얄개들의 『메주』가 생각난다. 뭐 ‘밀당’이라고 표현되는 행위나 내재적 발상은 이와는 크게 관련이 없다고 생각이 드니까. 일부러 아마추어틱한 라이브 영상을 골랐다. 가창력이 없는게 더 나을때도 많다. 아래는 노래의 가사의 일부이다.

처음 널 보고 널 사랑했어
두 번 널 보니 넌 못생겼어
이런 날 보고 넌 도망쳤지
그런 널 보고 널 사랑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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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언젠가 인터넷에서 본 이 사진도 생각난다. 사실 이건 ‘으으으으 못생겼어’라는 발화가 실제 내적 상태를 충실히 반영했다면 내 해석이 맞다는것이 신뢰성을 부분적으로 얻겟지만, 그렇지 않다는 가정 하에는 조금 음침한 해석으로 ‘보짓값을 올려받는 호객 행위’로, ‘ 내 남친에 비해서 더 나은 사람이야. 그러니까 나한테 잘해’ 뭐 그런 의도를 가졌다고도 생각이 든다. 현실에서 이런 말을 하면 매장당하니까. 음음

어쩌면 그들이(나는 포함이 안되니까….) 기대했던, 또는 상상헀던 또는 기억하던 상대의 모습은 언제나 현실의 상대와 항상 불일치될수밖에 없다. 위에서 언급한 베르그송의 ‘삶의 약동’ 과 같은 관점에서 보면 말이다. 4차원 테서랙트가 w축으로 움직이면 3차원의 우리에게는 이해할수 없는 움직임을 (사실 이산적으로 이해는 되는데, 직관적이지가 않다.) 보이듯이, 언제나 상대는 나의 예상과 불일치한다. (이것이 내가 인식의 한계에서 시간성이 창출된다고 주장하는 이유이다.) 하지만 그 불일치에서 오는 새로움과 짜릿함에서 사랑의 의미를 발견한다고 말하는 경우도 더러 있고, 이러한 변화를 필연적이라고 생각하고 받아드려 안정감을 챙기는 경우도 있다. 여기서 우리는 항상 무언가를 잃고, 잃음을 추구하며 또 ‘잃음’도 추구하지 않는가. 그 잃어버림 속에서 ‘잃음’ 그 자체를 추구하는, 그 불일치가 양가적인 감정과 방어기제를 부른다, 호시노가 바로 그런 상태다.

“야!” (필리아에게 만나면 알아보도록 하는 표시로 사과를 말했음에도 그 사과를 유이치에게 주며) “갖고 있어” “잠깐 와봐(…)” “누가 아는 체 하면 그거 주면 돼.”

이 부분이 다른 이들의 해석에서 종종 무시되는데, 호시노와 츠다의 복잡한 관계의 연장선 상에서 부정과 긍정, 점유와 이탈, 비-현존의 현존과 같은 일종의 모순으로 보이는 복잡한 층위의 감정을 무엇보다도 잘 보여주는 두 장면이라고 생각한다.

혹자는 호시노의 끔찍한 범죄 행위를 옹호하려는 감독의 시도가 도덕적으로 편향되었으며, 결과적으로 영화의 감성과 여러 메시지들의 열정적으로 훼손하며 가치를 깎아내렸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건 영화를 잘못 봤다고 생각한다. 이 감정과 복잡한 관계성에서 엿보는 인간 근원의 욕망적 알고리즘까지, 영화 내에서 전해주고 싶은것은 바로 이것이다. 누구는 ~~했고, 이런식으로 육하원칙에 충실하게 적은 줄거리 요약으로, 행동과 사건을 주제로 영화를 전부 해석한다는건, 너무나도 얕은 사유이다.

“연을 타고 싶어요.” “엄청 무서울걸. ” 하늘을 날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