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초적 공리에 기반한 연역적 사고관을 통해 경제- 사회적 인과연속에 미치는 각각의 - 인간행동학적 - 매개변수를 연구하여 현실적 인과관계를 파악하는 자유지상주의1)에서의 공리적 기초란, 갈등의 비폭력적 해결을 목표로 하는 논증의 윤리적 당위성을 통한 자기소유권과, 궁극적인 자유를 실천해야만 한다는 인간행동의 규칙에 대한 도덕적 정당화에 있다.
이러한 자유지상주의의 사상적 기반을 성립한 한스 헤르만 호페가 인간 행동적 경제관에서 자유가 중심에 있어야만 한다는 이유를2) 찾은 것이 바로 논증 윤리이다.
구체적으로, 호페는 논쟁 과정(the course of argumentation)에서 그 누구도 자신이 스스로 ‘상정하고 있는’ 그 어떤 전제도 일관되게, 논리성을 갖추면서 부정할 수 없음을 지적한다. 그렇게 한다면, 그는 논리적 오류 중 하나인 수행모순(performative contradiction)을 범하는 것이고, 논리가 없으므로 설득력을 갖출 수 없다.
간결하게, 호페는 언어는 객관적인 의미를 지녔고, 진실은 거짓보다 바람직하며, 주장은 정당화 되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그것이 바로 논쟁의 아프리오리3)이다. APoA는 위르겐 하버마스와 칼 오토 아펠의 담론윤리, 라스바드의 의무론적 윤리에 기초하지만, 이 글에서는 아펠의 선험화용론 논변을 중심적으로 APoA를 설명해보고자 한다.
먼저 아펠은 APoA에 바탕이 되는 “수행적 자기 모순“ 개념을 의식 철학의 기본 문제에 적용함으로써 선험화용론 논변에 도입하였다.4)5) 예컨대, -아펠의 표현을 빌려- 수행적 자기 모순이란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같은 자기 지시적인 문장이 화행의 수행적 구성부분에 모순된다는 것이다.6) 이 추론은 아펠이 주장하듯이 보편화-근거적 가능성을 부인하는 철학적 회의주의자에 반대하여 더 나아가 사용될 수 있다. 왜냐하면 회의주의자의 보편화-근거적 가능성의 부인을 위한 일련의 근거들을 나열하는 순간 그 또는 그녀는 이미 논증적 대화타당성의 보편적 전제7) 를 가정하지 않고서는 그러한 주장의 언어적 토대조차도 부정되기 때문이다. 이 가정들의 불가필성은 합리적 비판 그 자체가, 선험화용론 논증에서의 철학적 토대의 의미에서 정당화된다는 것을 수반한다.8)
또한 하버마스의 견해에 따르면 철학적 회의주의자가 주장하는 행위 그 자체가 스스로를 수행적 모순 9) 에 연루시키게 한다. 그러한 논증을 하면서, 만일 비판적 검토를 목적으로 하는 여하한 논증 게임에서 피할 수 없는 가정을 할 수밖에 없다면 말이다.
나아가 이제는 한스 헤르만 호페의 글을 읽어보자.
“논증은 아무 맥락과 근거가 없는 명제로 구성되지 않는다. 그것은 희소한 수단의 사용을 필요로 하는 행동의 한 형태이다. 그리고 한 개인이 논증이라는 명제적 교환에 참여함으로써 입증하는 선호가 곧 사유재산임이 나타난다. 첫째로, 만약 우리가 자신의 물리적 신체를 독점적으로 이용할 권리가 이미 전제되지 않았다면, 그 누구도 어떤 것도 제안할 수 없었을 것이며, 논쟁의 수단에 의해 제시된 어떤 명제에도 확신할 수 없었을 것이다. 논쟁은 서로가 자신의 신체에 대한 상호 배타적 통제를 인정하는 행위로, 이는 말해진 명제에 대해서는 서로 의견이 다를 수 있지만, 적어도 ‘의견 차이가 존재하고 있다’ 라는 사실 자체에 대해서는 언제나 동의가 가능하다는 명제적 교환으로서의 논쟁의 특색을 통해서 이해할 수 있다. 이로써, 어떤 규범을 정당화하려고 시도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기소유권이 선험적(a priori)으로 정당함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점이 명백해졌다. 정말로, “나는 이러이러한 것을 제안한다”를 말하기 위해서는, 자기 신체에 대한 배타적 통제권이 정당하다는 규범을 전제해야만 한다. 자기소유권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누구나 수행모순(practical contradiction)에 직면하게 된다. 그렇게 주장하는 그 순간, 그는 이미 반대하고자 했던 바로 그 규범,
자기소유권은 암시적으로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10)
하지만 이를 1차원적인 관점에서 해석한다면 순환논리의 오류라고 지적할수 있다. - 가령 ”언어는 객관적인 의미를 지니고, 진실은 거짓보다 바람직하며, 주장은 정당화 되어야만 한다.“라는 당위명제의 근본적 원인을 찾을 때 ”그래야 수행모순이 아니다.“ 라는 순환논증을 범하게 되는 것으로 보인다. 즉 APoA의 당위로써 사용되는 수행모순을 설명하기 위해서 –그 필요성을 증명하기 위해서- 또 수행모순이 사용되는 순환논증의 오류라고 생각할수 있다.
하지만 화용론적 관점에서, 수행모순의 부정은 현실적 소통 공동체의 성립 근거로 작용한다. 우선 인간은 상호주관적 소통과 사회적 작용이 가능한 존재이다. 이를 담론과 논쟁의 윤리라고 한다. 담론과 논쟁의 윤리의 필요조건으로, 그것을 담지하는 현실적 소통 공동체로서의 담론 공동체가 전제되어야한다. 즉 사회적 작용이 기능하는 대상으로서 담론 공동체가 존재해야하고. 현실적 소통 공동체가 전제되지 않는다면 APoA또한 성립할수 없다.
또한 화용론의 주된 논제인 상징과 해석자의 관계11) 에서 수행모순은 다른 사람들과의 공존 기반인 언어를 부정함으로써 화용론적 모순을 범하게 된다. 따라서 결과론적으로 언어의 목적이자 사용처인 현실적 소통 공동체의 존립을 위협한다. 또한 현실적 소통 공동체의 존립 위협은 절차적으로 현실적 소통 가능성을 파괴하고, 가중되어 담론의 구성원인 자신과 다른 구성원을 모두 부정하는것에 초래한다. 사회적 존재인 인간 삶의 가능성 또한 부정하는 것이다. 아울러 언어의 온전한 기능적 작동은 상징과 해석자의 관계의 3요소의12) 올바른 상관관계가 필수적이다. 하지만 수행모순은 표현과 대상과의 관계, 대상과 해석자의 관계, 해석자와 해석자의 관계를 부정한다. 그것을 순서대로 선험적 모순, 수행모순, 거짓말이라고 한다. 이러한 모순들이 화용론적 구조의 각 관계에서 모순을 일으키고, 결국 이 모순이 공동체의 존립 근거를 부정한다.
더구나 거짓말13) 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담론 공동체가 전제되어야 한다. 하지만 수행모순은 위에서 봤듯이 담론 공동체를 부정한다. 거짓말의 성립조건에 따라 -
거짓말의 성립 조건
- 두사람 이상으로 구성된 공동체
- 진리에 대한 합의
거짓말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참에 대한 합의가 선제되어야하며, 이 합의를 토대로 참과 거짓에 대한 판별이 가능해야한다. 따라서 참에 대한 합의와 참과 거짓에 대한 판별을 수행하는 소통공동체가 수행모순으로서 전제되지 않는다면 거짓말조차도 성립하지 못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 즉 수행모순은 수행모순 조차도 부정한다. 따라서 수행모순은 인식론적, 선험적 관점에서 자신을 부정하며, 화용론적 차원에서 자신이 속한 의사소통 공동체를 부정하고 파괴하고, 수행적차원에서는 자신의 인격적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의사소통을 통한 공동체적 상호 의존성에 대한 반성론적 깨달음이 상호주관적 도덕성의 토대가 된다. 즉 화용론적으로 파악된 수행적 화행이다. 따라서 담론 윤리의 성립 근거가 발설행위와 발언 내용의 일치에서 유발되고, 수행모순은 도덕적 의사소통을 침해하는 것이다.
언어행위의 규범적 필연인 것이다.
하지만 아도르노의 관점을 살펴보자. 부정 변증법”으로서의 진정한 비판의 관념은, 동일성 사유에 대한 비판을 통해 도달된다. “동일성 사유”는, 개념을 개념의 주제(대상Sache)과 등치시키는 모든 견해를 나타낸다. 이것은 개념적 사유의 중개를 통하여, 일어나고 있을지도 모르는 것과는 독립적인 즉각성의 사실을 파악하는, 보편적인 것 하에 구체적인 것을 포섭하는 분류적 의식이다. 수학의 형식주의는 이런 종류의 사고를 가장 추상적으로 보여준다. 그러나 그것은 과학을 거쳐 매일매일의 실증주의적 이데올로기 전반에까지 다 닿는다. 인식은, 그 자신의 개념을 통해, 존재 그 자체를 굴종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고 존재에 대하여 통제력을 획득했다고 믿는다. 그러나 인식이 이러한 일을 더 많이 하면 할수록, 의식이 그것에 의해 계몽하는 의식 그 자체를 위해 중개되는 그러한 과정에 대해 더 눈이 멀게 된다.
계몽은 신화로 돌아간다. 계몽은 신화를 어떻게 피해야 하는지를 진정으로 안 적이 없다. 왜냐하면 그 형태에서 외관은 현상태를 반영했기 때문이다. 세계의 사이클, 숙명, 그리고 지배. 희망 없는 진실처럼 말이다. 신화적 심상의 간단명료함(succinctness)와 과학적 공식의 명료성 양자 모두, 사실인 것의 영원함(permanence)에서 확인되며, 그리고 순수하고 단순한 것의 단순한 존재는 그것이 가리는(occludes) 의미로서 표현된다.“(계몽의 변증법, p.27) 근대, 그리고 계몽된 의식에 대한, 새로운 형태의 신화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사유로서 그것들에 대한 이 비판은, 계몽의 변증법을 조직화하는 논제다.
그러나 이것 이상으로, 사물과 다른 사람들의 외부의 적대적인 외관-즉 동일하지 않은 “다른” 주체성-은 동일하게 되어야만 한다. 만일 주체가 그 자신에 대하여 통제력을 가지려면 말이다. 도구적 이성은 자아를 규율하는데 기여한다. 다른 자아의 지배에 요구되는 도구적으로 합리적인 통제를 통해서 말이다. 주체의 자기 보존에 기여하는 도구적 이성의 진전은 다른 사람임과 비동일성을, 합리적이고 동일한 것으로 만들어질 수 있는 무언가로, 즉 그리하여 “그 자신과 같은 것”으로 처리할 수 있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렇게 낯설고 적대적이며 비합리적인 채로 남아 있어서, 파괴되거나 “비존재”로 억압되어야 한다. 모든 것은 주관적이고 동일화하는 이성에게로 예속되어야만 한다. 여기에 수반되는 것은, 주체성을 위한 주체성의 희생이다. 남성과 여성은, 증강된 정신적 그리고 사회적 억압에 의해 획득된 그들의 증강된 권력을 위해 대가를 치러야 하는 것이다.
아도르노에 대한 하버마스의 불만은 이것이다. 부정의 변증법은, 개념적 사유에서 억압되는 객관적 요소에 동정을 표시하나, 개념과 사물을 등치시키는 “지배하는 원칙”을 반복할까 하는 두려움 때문에 “개념화하려는” 시도 자체를 금지당하게 될 수밖에 없다. 하버마스의 관점에서, 아도르노는, 그러한 공식에서 새로운 신화를 창조하고 있을 뿐이다. 즉, 그 자신의 지배하하는 주체성을 충분히 일관되게 부정하는 의식과 함께에서만 억압된 자연은 돌아올 것이라는 신화 말이다.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 사회적으로 필수적이라는 주장은 인정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러한 주장을, 그것의 역사적 표현과는 독립적인 이성을 재구축하는 유사 선험적인 정당화(quasi-transcendental justification)로 사용하는 것은 정당하지 못하다. 여기서 하버마스는 아도르노가 심혈을 기울여 구분하려 했던 것을 섞고 있다. 즉, “사회”의 역사적 관념, 즉 “참되지 않은” 전체로서 인식된 것과, 그 사회 안에서 그 사람 자신의 합리적 삶을 살아가는 개인.
하버마스에게 진리 추구는 의사소통적 합리성의 초석으로서, 사회적이기 때문에 합리적이다. (그것은 상호작용을 요구한다.) 그리고 또 그 역도 성립한다. 그러나 이것은 사회에 대한 지성화된 관념이다. (….) 인식적으로 구속적인 것이 사회적으로 구속적인 것이 되도록 결정하는 것이 의사소통적 합리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