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하늘은 어떤 불가사의 (不可思議)의 깊이에로 사라져가고,
있는 듯 없는 듯 무한(無限)은
무성하던 잎과 열매를 떨어뜨리고
무화과나무를 나체(裸體)로 서게 하였는데,
그 예민한 가지 끝에
닿을 듯 닿을 듯 하는 것이
시(詩)일까.
언어(言語)는 말을 잃고
무한은 미소하며 오는데
무성하던 잎과 열매는 역사의 사건으로 떨어져가고,
그 예민한 가지 끝에
명멸하는 그것이
시일까.

  • 김춘수「나목(裸木)과 시(詩)」서장(序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