펠라기우스와 켈트 영성; 자유주의적 흐름

주제: 역사, 종교

  1. 역사의 전개

5세기의 서유럽은 매우 혼란스러웠다. 로마제국의 분열 이후에 게르만족이 대이주를 시작하였고, 이러한 혼란들로 인하여 사람들의 소비지향은 단기화되었다. 길거리에는 쾌락과 남용만이 가득했다.

펠라기우스는 로마령 브리타니아 속주 출신의 기독교 평신도였다. 그는 매우 극기적인 수양 정신의 소유자였고, 고대 그리스어와 라틴어를 구사 및 집필할 수 있었다. 그는 법학을 공부하고자 서로마 제국을 방문했다. 그가 목격한 것은 망가져가는 사회였다. 사람들은 쾌락에 찌들어있었으며, 시간 선호는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그는 목소리를 내었다.

‘당장 이것을 멈추시오! 우리에게는 하느님이 내려주신 선함과 능력이 있소!’

펠라기우스는 높은 신실함과 카리스마로 사람들을 끌어모았다. 그 과정에서 이름은 널리 알려졌다. 후에 그의 숙적이 될 성 아우구스티누스 조차 그를 ‘가장 뛰어난 그리스도인’이라고 평할 정도였다. 특히 그는 젊은 부자들과 귀족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

그에게 제자가 하나 생겨났다. 그 제자는 바로 카엘레스티우스였다. 카엘리스티우스는 펠라기우스의 가르침을 체계화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가 바로 교회사에서 원죄와 성삼위일체의 성령을 부정하고, 순수 행위만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이단인 ‘펠라기우스주의’였다.

펠라기우스주의는 빠르게 퍼져나갔고, 다른 의미의 혼란을 로마에 주기 시작했다. 펠라기우스 본인은 성삼위일체를 부정한 적이 없는 정통적인 평신도였다. 단지 그는 교리보다는 로마 사회의 개혁에 집중했던 이였을 뿐이었고, 스스로 조차 카엘레스티우스에게 자제하라고 했을 정도였다.

이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성 히에로니무스나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교리적 이유로 펠라기우스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펠라기우스도 이런 상황에서 자신의 믿음을 방어해야만 했다.

오랜 시간 공방이 이어졌다. 결국 431년의 에베소 공의회에서 펠라기우스와 카엘레스티우스는 이단으로 정죄되었다. 그것이 교리적 패배인지, 정치적 공작으로 인한 패배인지는 모른다. 결국 그는 예루살렘에서 쫓겨났다.

정죄 이후 그는 알렉산드리아의 성 시릴의 도움을 받아 이집트에 정착했고, 더 이상의 기록은 남아있지 않았다. 하지만 이후에 브리타니아 지역에서 아래에 후술할 동방-요한-켈트 전통이 활발해진 것을 고려하자면, 그가 브리타니아에 돌아와서 칩거하며 조용히 지냈을 수도 있다는 학자들의 의견이 있다.

동방-요한-켈트 전통의 유산은 성 패트릭과 같은 켈트 기독교 선교사들로 이어졌고, 당시 켈트 다신교인 드루이드교가 매우 강세였던 아일랜드 지역을 기독 신앙으로 완전히 개종시키기도 하였다.

아일랜드에 있어서 기독교의 전파는 노예제를 약화시켰고, 우상에 대한 인신공양을 없애는 역할을 했다.

  1. 각각의 특징들

5세기, 이 시기의 기독교는 대표적으로 두 가지의 전통로 나뉘었다. 하나는 동방-요한-켈트 전통이고, 하나는 서방-베드로-로마 전통이다. 펠라기우스와 켈트 기독교인들은 동방 전통을 매우 충실히 따랐다.

그 특징은 이러하다.

(1) 동방-요한-켈트 전통:

  • 창조의 선함
  • 신체와 성(姓)에 대한 감각성과 긍정성
  • 창조와 삶 가운데 하나님의 심장의 박동소리를 듣는 관조적 태도
  • 자연친화적 태도 및 범재신론/만유내재신론(켈트 드루이드교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
  • 남성과 여성의 동등성(펠라기우스는 여성에게도 성경을 가르쳤고, 아일랜드의 수호성인 중 한 명인 성 브리짓은 여성 사제였다.)
  • 공동체적 수도원 방식의 선교
  •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뿐 아니라, 그 분이 걸으셨던 길을 따라서 걸을 수 있도록 노력을 합시다.”

(2) 서방-베드로-로마 전통:

  • 원죄의 강조
  • 신체와 성(姓)에 대한 엄숙함
  • 신실한 행동과 제도권 교회의 권위, 외양적 통일성
  • 유일신론
  • 남성 중심의 위계질서를 강조(로마 가톨릭과 교황의 존재 및 남성들만이 사제가 될 수 있는 교회법을 생각해보자.)
  • 중앙집권적 방식의 선교
  • “원죄로부터의 자유로 가는 길은 오직 믿음 뿐입니다.”

동방의 전통은 동방 정교회가 현재 이어나가고 있고, 서방의 전통은 로마 가톨릭과 개신교가 이어나가고 있는 중이다. 큰 그림으로 보았을 때, 전 세계적으로 서방 전통이 매우 강세인 편이다.

  1. 자유주의자는 여기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

기본적으로 자유주의의 시작점이 경제학, 특히나 엄격한 공리-연역적 논증을 고수하는 인간행동학이라는 것을 생각한다면, 이러한 역사와 종교에 관한 이야기는 분명 거리감이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인간행동학을 공부하는 이라면 가끔씩 여유가 생길 때에 이러한 비합리적인 부분을 배우거나 알아두면 좋은 점이 있다. 인간은 결국 합리성과 비합리성이라는 두 가지 영역 모두에 영향을 받으며 살아가기 때문이다. 나중에 무정부-자본주의 사회의 사례들을 연구하고자 한다면, 역사 공부는 필연적이다.

거기에 나는 (우연의 일치이거나 주관적인 판단이겠지만) 이러한 요한 전통 기독교의 영역에 자유주의와의 몇 가지 교차점들을 알 수 있었다.

(1) 직관적으로 보자면 펠라기우스와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대립은 오늘날의 정치철학적인 관점에서 자유주의와 권위주의의 대립과 매우 비슷하다.

  • 펠라기우스는 인간의 자유의지와 극기적 태도 및 개인의 책임을 강조하여 혼란스러운 사회에 새로운 질서를 가져다주기를 바랬다.

  • 그와 반대로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의 원죄와 타락을 강조하며, 신에게의 절대적인 믿음과 의존을 강조했다.

(2) 머레이 로스바드는 자신의 서적인 ‘새로운 자유를 찾아서: 자유지상주의 선언’에서 대표적인 무정부-자본주의 사회의 예시로 게일 아일랜드를 예시로 들었다.

그 게일 아일랜드의 종교적 골조는 바로 ‘켈트 드루이드교’ 및 ‘켈트 기독교’였다. 특히 ‘켈트 기독교’의 전개 시기는 5~11세기였다. 그 이후로는 로마 기독교에 천천히 흡수되었다.

(3) 스콜라 학파의 시조인 존 스코투스 에리우게나는 9세기의 아일랜드 출신 학자이다. 그는 프랑스의 샤를 2세의 궁정에 들어가서 연구와 주석 작업을 했다. 그의 종교관은 범재신론/만유내재신론으로서 켈트 기독 신앙의 영향을 적지 않게 받았음을 예상할 수 있다.

스콜라 학파가 중기를 넘어서면 오스트리아 학파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스페인의 살라망카 대학이 등장하게 된다. 다만, 에리우게나와 살라망카 대학 사이의 기간이 정말로 길기에 에리우게나의 영향력은 매우 적을 것이다.